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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자연스러운 예배

청죽골 2007. 11. 14. 11:10

자연스러운 예배

정원 목사의 ‘영성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에서

병자를 보는 바리새인의 시각은 어떤 면에서 온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법을 바르고 정확하게 지키려고 하는

열정과도 관련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옳았을 지는 모르지만

결코 따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옳기는 하지만 냉정하고 따뜻하지 않은 것,

이와 같은 냉정함은 융통성이 없는 경직됨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냉정하다는 것과 융통성이 없다는 것,

관용이 부족한 것과 경직되어 있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엄격한 경직성은 따뜻함과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정확한 것을 좋아하고 매사에 분명한 법칙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가 정확하기는 하지만 매정한 면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밥은 반드시 몇 시에 먹어야 하고,

잠은 몇 시에 자야 하고 항상 청결을 유지해야 하며……

이런 식으로 법칙을 만들고 그대로 사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대하여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따뜻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경직됨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움을 훈련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교회에 가는 것이며 예배를 드리는 것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나타내주는 가장 일반적인 표지가

그가 주일에 교회에 가느냐, 아니냐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알려지는 것이

그들의 따뜻한 마음, 상대방을 항상 섬기고 배려해 주는 마음,

어떤 틀에 묶여있지 않은 자연스러운 삶과 인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이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것에 의해서 알려 진다는 것은

조금 슬픈 사실이기는 합니다.
교회에 가는 것 외에는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하는 것이 별로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서 물을 때

주님을 사랑하느냐고,삶의 우선 순위가 무엇이냐고,

영혼의 진보를 원하느냐고 묻지 않고, 교회에 다니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신자들을 ‘아름다운 사람’이라거나

'따뜻한 사람’이라거나 ‘지혜로운 사람’,

이런 식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가는 사람’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그들과 다른 어떠한 긍정적인 특징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만 인식한다는 것,

그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금 열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표현이나

고백을 자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도에 힘쓰며 주위에 있는 이들을

교회에 데려가려고 몹씨 노력합니다.
종교 문제로 심각한 논쟁이 생기기도 하며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경우

열심히 변호를 하거나 화를 내거나 상대방 주장을 반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나 고백은

그들의 속에 형성되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기보다는

그냥 단순하게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에 의해서 입력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래서 그러한 고백들은 삶과 분리되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신앙과 종교에 대한 열정적인 자세와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삶은 별로 구별되어 있지 않고 냉랭합니다.
그들의 삶은 비신자들과 비교하여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과 똑같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욕심을 부립니다.
그들의 앞에서 포근함과 안식을 느끼게 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은 별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뭔가 경직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

보통의 일반적인 삶에 대해서는 불신자와 별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고

종교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몹시 일방적이고 경직된 자세를 가지고 잇는 것,

이러한 경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나는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이중적인 면은

그리스도인들이 보통 드리는 예배와 많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드리는 예배가

형식 중심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외식하는 삶이 될 것이며 실제적인 변화를 동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예배가 형식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주님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가 딱딱하고 경직된 것이라면

그의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또한 예배가 아름답고 따뜻하며 사랑스러운 것이라면

그들의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예배의 패턴과 형태는

곧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패턴과 형태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통해서 단순히 교리를 배우고 지식을 얻을 뿐이며

그 영혼의 움직임을 느끼고 주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삶은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지식뿐인 냉랭한 신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며

실제적인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삶,

사람을 사랑하는 법, 실제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를 배우지 않고

단순히 하나의 의식을 마치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는 신앙의 연륜이 오래 될수록 실체는 없고

형식과 습관만을 가진 피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고 있던 초기에 잠시 교제를 나눈 적이 있는

어떤 여집사님이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되어 한번 정도 아내와 함께 실제적인 믿음에 대하여

잠시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는 나의 이야기에 몹시 감동을 받고는

우리 교회 저녁집회에 참석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예배시간을 잘 몰라서 30분이나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배시간에는 별로 감동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깜짝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자연스러운 예배에 별로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혼자서 일방적으로 예배를 이끌어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도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오늘은 어떻게 지냈는지,

삶 속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이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는지

물어 보기도 하고 성도들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러한 것에 너무 놀랬었던입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성도들과 목회자는 예배가 끝난 후에는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으나

예배시간에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개인적인 대화와 교제에서는 감동을 받을 수 있었으나

예배를 드릴 때는 적응이 몹시 어려웠던 것입니다.


평소에는 자유롭게 무슨 이야기든지 나눌 수 있으나

일단 예배가 시작되면 모두가 굳어져서 일정한 순서에 따라

조금 치의 오차도 없이 예배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인식,

그것은 보편적인 인식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일수록

그들은 어떤 경직된 형식과 고정된 예배의 틀에 익숙해 집니다.
예배전의 묵상 기도, 한 두 곡의 찬송가, 그리고 대표 기도,

그리고 정확히 규정된 시간에 끝나는 설교…

모든 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진행됩니다.
찬송가도 다 아는 곡으로 정확한 박자로 변화가 없이

4절까지 진행되어야 하며

대표 기도의 내용도 거의 천편일률적인 것으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거기에 변화가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성도들은 ‘무슨, 이상한 이단이 아닐까?’ 하면서

마음의 문이 닫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인식입니다.

예배 후에는 웃을 수도 있고, 농담을 할 수도 있으며

여러 가지 자연스러운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해도

예배 때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는 주님 앞에서 드리는 것이므로

주님 앞에서는 모두가 그저 잠잠하게 있어야만 하며

예배가 끝나면 주님은 어디론가 출장을 가버리고

우리만 남기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하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 적으로 볼 때 신약의 예배는 구약과는 달리

성령의 인도하심과 운행에 따라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에 대한 성경의 인용은 주로 구약 성경에서 인용되는데,

신약에서는 구약과 다르게

예배의 형식에 대한 어떤 규정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시와 찬미, 예언, 가르침 등이 성령 안에서

다양하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영혼의 자유로움과 주님의 영의 임하심을 위하여

자연스럽게 찬양을 인도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찬송가도 사용하며 영이 깊어지면 경배 곡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후렴을 반복할 때도 있고, 침묵기도를 드릴 때도 있으며,

열정적인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 공간에 주님이 임하실 때 우리는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습니다.
적어도 군대식으로 모두가 박수를 치게 하고, 모두가 손을 들게 하고……

그런식으로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기계적인 방식의 찬양은 주님을 제한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적을수록,

주님을 기다릴수록 주님의 영은 직접 임하시고 성도들을 만지십니다.
거기에는 깨달음이나 평화로운 마음이나 눈물과 기쁨 등이

동반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나는 예배는 주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맛보고 즐기는 것이며

또한 주님을 붙들고 사는 일상의 삶을 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우리와 주님의 교제이며 또한 동시에 성도와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배 중에 서로 인사를 시키기도 하고

포옹을 하도록 인도하기도 하며

짝 기도를 시키거나 고민을 나눌 수도 있게 합니다.
예배가 형식적으로 진행되면 성도의 삶도 형식적인 신앙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예배에서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서로를 향하여 웃고, 미소 지으며, 격려하고

자연스럽게 따뜻함을 나눌 훈련의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이것을 훈련할 수 있으면 우리는 밖에 나가서도

그러한 행동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서로 포옹과 기도를 시키고, 나는 조용히 찬양을 합니다.
그들의 두 세 명이 손을 잡고 소곤거리며 기도 할 때,

나는 주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스러움, 아름다움, 자유함이

이러한 예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몹시 고통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인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우리 교회 예배드리러 왔다가 심하게 따졌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를 시작하면서

‘다 같이 묵도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하면서 시작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형제는 신앙이 좋은, 귀하고 아름다운 형제였지만,

불쌍하게도 신앙의 경직성이라는 질병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저녁이면 온 가족이 모입니다.
피곤한 아빠가 집에 돌아옵니다.
그들은 식탁주위에 둘러 앉습니다.
어머니가 선언합니다.
“지금부터, 오늘의 세 번째 식사,

즉 저녁 식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다 같이 묵념?”
그렇게 그들의 식사는 시작됩니다.
과연 그것이 자연스러운 식사일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는 이런 식으로 합니다.
아내와 나,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과 4학년인 딸이 식탁 주위에 둘러앉습니다.
아무나 한 사람이 식사 기도를 합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식사 기도는 간단합니다. 모두들 배가 고프니까요.
그리고 나면 하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합니다.
제일 재미있었던 일, 또는 속상했던 일도 이야기 합니다.
대부분 웃음꽃이 핍니다.
자, 이것은 자연스러운 식사가 아닐까요?


묵념을 한다. 실시! 이제 숟가락을 든다. 시작!

이런 식보다 낮지 않을까요?

왜 사람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을 좋아하면서

오직 예배 시간 만큼은 경직된 태도를 가지는 것을 좋아 할까요?
왜 그들은 주님은 평소에는 하늘에 계시고, 예배시간에만 이 땅에,

교회에 머무리신다고 생각할까요?
평소에는 막 살아도 되지만, 예배 후에는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지만,

왜 예배 때만 죽음 같은 침묵 속에서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주님의 존재가 당신에게 있어서 하나의 개념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존재가 될 때, 당신은 더 이상 의식적인 예배,

의식적인 기도를 드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좀 더 자연스러운 일상의 언어로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기도는 어떨까요?

오 주님.
지난 한 주간동안, 정말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군요.
정말 피곤하고, 뭔가 쫓긴 것 같이…

그렇게 살았던 한 주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생각해 보니,
당신께서 너무나 저와 가까이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안에 계신 주님을 잊어 버리고
바쁘게, 정신 없이 뛰어다닌 것 같이 느껴 집니다.
하지만 지금, 이제 다시 당신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머리 숙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께 뭔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아직 여러 가지의 복잡한 상황들이 저를 둘러싸고 있지만,
주님, 당신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항상 같이 계셔주시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제가 좀 더 주님을 의지하고,
환경을 바라보지 않도록,
저를 도와 주시겠습니까?
주님, 진정 제 마음이 흔들리려고 할 때,
저를 조금 더 붙잡아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주님,
항상 저를 받아주시는 것,
얼마나 제가 감사하고 있는지요.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 마음을 주님께 하나씩 고백해 나갈 때,

이 때쯤 해서 당신의 얼굴이 눈물로 젖기 시작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따뜻하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털어놓고 드리는 기도 가운데

주님이 임하시고 당신은 그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당신이 주님을 실제적으로 접촉하게 된다면,
당신은 자연스러워 집니다.
당신은 더 이상 경직된 존재가 되기 어렵습니다.
당신은 예배를 즐기게 됩니다.
신앙을 즐기고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보다

기도를 더 재미있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러한 자연스러움, 융통성이 증가될수록

당신의 삶의 자세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예배 때만이 아닌 삶의 모든 순간에서

주님의 임재를 점차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모든 삶 속에서

좀 더 편안하고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자연스러운 사람으로

변화되어가게 될 것입니다.

정원 목사의 ‘영성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