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사형제도(死刑制度))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형제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어떤 이들은 사형제의 나쁜 점이 많다고 한다. 비록 지은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잘못을 뉘우친 사람의 모습을 보면 차마 어찌 죽일 수 있느냐는 이유와 행여나 있을 잘못된 재판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에게는 사형이 돌이킬 수 없는 사회의 결정적인 잘못이라는 점 등이 그 이유이다.
일리가 있고,
여기에다가 과연 어느 누가 사형을 집행할 윤리적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에 까지 이르면,
양심적으로는 차마 아무 말도 못하게 될 수 밖에 없게 된다.
마치 간음한 여인에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예수님의 준엄한 말씀을 들은 무리들처럼 말이다.
이와는 반대로, 사형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제의 긍정적인 기능이 너무나 많다고 주장한다. 비록 사형이 인간적으로는 비정하고 또 때로는 오심으로 인한 부작용도 있을 수는 있지만 그 흉악하고도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짐승 같은 인간을 어찌 먹여주고 입혀주고 보살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한, 피해자의
가족들이 평생을 지니고 다녀야 할, 죽은 자에 대한 양심의 짐을 벗어나게 해야 하고, 이러한 사형제가 있음으로 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흉악한 범죄가 예방되는 효과가 너무나 크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분명히 거역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자 그러면, 성경 특히 인간 영혼에 대한 사랑의 메시지를 직접 몸으로 나타내 보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에는 사형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을까?
구약시대에는 분명히 사회적으로 사형이 인정되었고, 성경 그
자체에도 사형이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음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억울한 죽음을
면하려거나, 생명을 연장하기를 원하는 경우는 소위 ‘도피성’
(the city of
refuge) 제도를 두어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고, 그 것도 대제사장이 죽게 되면 사형을 면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본다.
(민수기35:25) -The assembly must
protect the one accused of murder from the avenger of blood and send him back to
the city of refuge to which he fled. He must stay there until the death of the
high priest, who was anointed with the holy oil. (Numbers35:25) –
이 도피성 제도는 당연히 이 세상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인 예수님을 미리 나타낸 제도이었고, 대제사장이신 주님이 십자가위에서 죽음으로서 인간 영혼의 해방을 예언한 것임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시대 내내 사형제도는 끊임없이 시행되면서
역사를 이어 왔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한 점은 예수님이 오신 후, 예수님 본인과 그 제자들 그리고 수많은 사도들이 사형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 자신은 물론,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베드로를 위시한 그 큰 사도들과 바울을 중심으로 한 위대한 사도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그 분들 중, 어느 한 분도 사형제가 잘못된
것이니 이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분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이 로마의
세력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위기와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 -Everyone
must submit himself to the governing authorities-
고 하면서, 권세는
‘잘못에 대해 공연히 칼을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범죄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리하는 자’(로마서13:4) -But if you
do wrong, be afraid, for he does not bear the sword for nothing. He is God's
servant, an agent of wrath to bring punishment on the
wrongdoer.(Romans13:4)- 라고 우리의 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본다.(로마서13:1-7)
그 분들이 어떤 분들인가? 당신이 직접 십자가의 사형을 당하실 것을 분명히 알고 계신 분이었고, 그 제자들은 그 처참한 사형당하심을 지켜보았으며, 어떤 이는 십자가위에서 거꾸로 매달려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고, 못박힌 통안에서 굴려져 짐승보다도 더 못한 죽임을 당하기도 하신 분들이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그 어느 분의 입에서도 사형제를 폐지하라는
메시지를 들을 수가 없다.
마지막 사형장에서 조차도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찬 종교인들과 사회지도자들의 죄악을 오히려 용서하고 계신 그 분들의 숭고한 태도를 통해 용서의 본을 볼 수는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계시로 만들어진 사형제 자체가 없어야 한다는 그 어떤 영감이나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주님이 십자가위에서 사형을 당하시지 않았다면…’이라고 상상 해본다면 어떨까?
만약 그 십자가의 사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전 인류를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나타난 창조주 하나님의 의는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역설적이긴 하지만,
간음한 현장의 여인이 돌로 맞아 죽을 뻔한 순간이 없었다면, 결정적인 회심의
기회도, 예수님을 만나 죄용서함을 받을 기회도 얻지 못하였을 것이고,
그 여인이 훗날 예수님의 장례 곧 주님에 대한 사형집행을 미리 준비하여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는 숭고한 신앙의 장본인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십자가위에서 조차도 저 흉악한 강도가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극적인 장면은 사형의 순간까지도 우리가 그 범죄인의 영혼을 끝까지 포기하
지 말아야 할 너무나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 않는가?
십자가의 강도에게는 그날 사형의 순간이 구원의 축복을 받은
날이었던 것이다.
사형제는 그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
죽음의 심판을 생각하게 하고,
죽음 앞에서 인간의 영혼을 벌거벗은 순수한 상태로 있게 하는 힘이 있다. 그 죽음이
양심의 가책과 회개와 진리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순간이라면, 오히려 사형이 그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형제의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신 앞에서 양심이 떳떳하여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리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사형제가 가지는 윤리적, 종교적, 영향력이 책상 앞에서 이론적으로만 인권 운운 하는 그 이상의 엄청난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사형이 가지는 의미있는 기능이 없다면-사형제가 만약 잘못된 것이라면- 당연히 성경에서 조차도 사형이
계시되지 않았어야 할 것이고, 또 예수님이 오신 후에도 그 제도의 폐지를 위한 투쟁이 있었어야 할
것이지만, 성경 그 어디에서도 그런 사회적 투쟁이나 반대운동을 교회 안에서 주장하거나 선동한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사형제도가 종교적으로 인간영혼에 던지는 의미도 너무나
크다.
범죄에 대한 억지력,
심판에 대한 두려움, 최후 수단으로서 주어지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형제의 폐지를 주장한다면,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그 흉악한
범죄행위로부터 받게 될 온갖 폐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사형수에
의해 이유없이 동물처럼 죽임을 당한 억울한 영혼의 죽음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수 있는 그 어떤 보장책을 제시 하여야 할 것이고, 당연히 그들은 여기에
대한 어떤 해답도 책임도 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사형수들이 겪게 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최후의 기회가 되도록 문자 그대로 있는 힘을 다 쏟아야 할
것이다.
주님을 아는 기회가 되고, 주님을 믿게 되었을 때 사형의 순간은 그에게 오히려 축복의 순간이 되기 때문이다.
저 십자가의 강도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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