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향해 축복기도하는
사람들(수정본)
온 세상이
온통 복만을 좇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것 같다.
복이라면 산 사람도 죽여서 제 복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나 않나 싶을
정도로 겁이 날 지경이다. 실제 보험금 타려고 남편 죽이고, 자식도 죽이려던
악마의
짓거리 같은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던가?
효자입네 조상께 드리는 제사를 절대 빠뜨리지 않는 어느 착실한 친구에게
물었다.
“자넨 왜 제사를 그리도 잘 모시는가?”
“다 복 받으려고 그러는 거 아닌감?”
일년에 하루 초파일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을 빠뜨리지 않고 가는 한 친구에게 물었다.
“자네 일년에 한 번은 꼭 절엘 가네
그려”
“복 받으려면 초파일 정도는
지켜야지”
그런데 그 복이란 게 도대체 어떤 것인가를 물어보면 거의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란다.
어느 날 교회엘 열심히 다니는 한
기독교인에게 물었다.
“교회엘 그리 열심히 다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축복을 받으려고요.”
“하나님 축복이 어떤 것이지요?”
“가족들 다 건강하고, 적당히 돈 벌어 꾸러 가지 않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지요.”
온 세상이 온통 복 받으려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의 모습을
봐야겠다.
마태복음5장에 나타나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복 받을 사람의 모습을 보자.
영어성경에는 그 복을 Beatitudes라고 해서 복중에서도 가장 큰 복(至福)을
말한다.
먼저 하늘 나라에 가려면 영적으로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여야 한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의 모양이
어떨까?
잘 살고 잘 먹고 모든 것을 여유를
즐기며 사는 모습일 수가 있을까?
하나님께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신음하는 고통(Those who mourn)을 치뤄야
한다고도 하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Those who hunger and thirst)의 모습은 오히려 측은할
정도로 애틋한 모습이 아닐까?
의(義)롭게 살려는 이유로 박해를 받는 받는 자들(Those who are persecuted)
의 모습은 또 어떨까?
그들에게서 흔히들 말하는 복받은 모습 즉 잘 먹고 잘 사는 모습과 연상이 될
수가
있을 것인가?
대개의 사람들이 말하는 복있는 사람의 모습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있는
사람의 모습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마태복음 5장 11절과 12절에서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온갖 모욕과 박해와 거짓 해악들을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Rejoice
and be glad, because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다시 말해 이 땅에서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에 가까울 찌라도, 저 하늘에서는 상이 클 것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복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말하는 잘 먹고 잘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할 것이다.
어떤 목사님들이 이렇게 가르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을 바로 믿으면 이
세상에서도 절대로 불행하게 살지 않는다. 물질에서도 복을 받아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나님이 물질의 복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곧잘
헌금을 향해 축복기도를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치 돈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사려는 것처럼
말이다.
자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그 한 이유로 처참한 사자의 밥이 되어, 사지가
갈갈이 찢기고 피투성이로 죽어간 초대 성도의 모습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 믿는다는 이 한가지 이유로 죽음과 폭력의 공포와
온갖 압제에 시달리고 있는 저 중동의 이슬람국가의 신자들이나 북한의 믿는
동포들, 그리고 중국내의 수많은 가정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일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큰 복에는 어디에도 잘 먹고 잘사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든 이러한 세속적인
복을 강조하여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 하더라도, 믿으면 세상적인
복을 받을 것이라고 장담하여서도 안된다. 이 순간에도 험악한 선교지에서
극한 상황과
싸우며 선교하고 있는 신앙인들을 생각하여서도 말이다.
더욱이나, 교회에서 헌금이나 받은 돈에 대해 축복을 비는 행위는 정말
멀리하여야 할 잘못된 행위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복을 받기 위해 헌금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 아연해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가 경고한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사도행전8:20> -Peter answered: "May
your money perish with you, because you thought you could buy the
gift of God
with money!-
않을는지?
타락한
세상과 교회를 향해 외친 미가(Micah) 선지자의 외침을 보자.
“ …제사장들은 대가를 기대하면서 가르치며, 예언가들은 돈을 위해 장래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아니하냐? 우리에게는 아무런 재앙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 her priests teach for a price, and her
prophets tell fortunes for money. Yet they lean upon the LORD
and say, "Is not the LORD among us? No disaster will come upon
us."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신을 섬기는 다른 민족들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더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것을
역사를 통해 분명히 보게 된다. 하나님을 알고, 그 아들 예수의 피로써 거듭난
영혼이 더 극심한 시련과 갈등의 어려움을 견뎌야 하는 일도 너무나 많이
보았다. 어찌 보면 차라리 믿지 않았다면 더 행복하고 더 멋있게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사탄은 안일하고 편안함에 빠진 영혼을 향해 승리의 쾌재를 부르는 것이다.
잘 먹고 잘사는 영혼, 행복에 겨워하는 영혼을 사탄이 가장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평안한가?
여기 누가복음 12장 13-21절의 바보인 부자(The Rich
Fool)에 대한 가르침을
보자.
‘여러 해동안 쌓아놓은 좋은 것들이 충분하니,
인생을 편하게 지내자. 먹고 마시고 즐겁게 보내자.’라고 말하고 있는 어떤 복받은 부자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보자.
‘이 바보야!(You
Fool!) 바로 오늘 밤에 네 생명을 돌려달라고 할 것이다.
(This very night
your life will be demanded from you) 그러면 너를 위해
쌓아놓은 것들은 누가 취하게 되겠는가?’
육신적인 필요를 채우는 일 즉 세속적인 복을 찾거나 기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성경에서는 이방인 즉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기는 인간들(The
pagan)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누가12:30)
이제 하나님의 도를 전할 때에 물질적인 축복을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물질적인 복으로 말하자면 미안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훨씬 더 많은
복을 받고
있음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지 않는가?
인간적인 생각으로 복의 기준을 정해놓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원망하고
신앙을 떠나버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신앙=육신적인 축복’이라는 잘못된
공식을
주입시켰기 때문이다.
마치 미신과 신격화시킨 인간숭배에 가장 앞선 일본이 세계의 부자나라에
속해
있다는 것에서 신앙의 회의를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이제 끝을 맺어야겠다.
‘돈’으로 대변할 수 있는 세상의 복 즉 잘 먹고 잘살고 쩡쩡거리며 행복하게
살아 가려고 하는 태도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려는 것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너희들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가
없다.(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누가복음16:13>
사람가운데서 높이 평가되는 것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혐오스런 것들이다.
(What is
highly valued among men is detestable in God’s
sight.)<누가복음16:15>
이제 오늘 날 교회에서 부와 인간적 축복을 비는 행위는 마땅히 자제되어야
한다.
‘더 많이 바칠 수 있도록 더 큰 축복(?)을 주시옵소서’
‘차고 넘치는 축복(?)을 부어
주시옵소서’
이제 이런 기도들은 과연 신앙인으로서의 마땅한 것인가를 말씀 안에서 다시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아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이런 기도를 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 때문
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또는 무엇을 입을까?’라고
하면서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상숭배하는) 이방인들이나 이런 것들을
추구하기 때문이고,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기 때문이다. <마태
we eat?' or 'What shall we drink?' or 'What shall we wear?' For the
pagans run after all these things, and your heavenly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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