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역사를 움직이는 힘

청죽골 2005. 8. 6. 06:13

역사를 움직이는 힘

 

역사를 전공한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역사 자체가 승자의 기록이고, 역사를 보면 신은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 고 했단다.

과연 그런가?  인류역사에 사실은 없고, 오로지 투쟁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의 조작된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인가?

이런 류의 피해의식을 가진 역사관에 대한 판단을 하기 전에, 참 이해하기 힘든 것은, 같은 대상을 두고 사람들이 이리도 정반대의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한 미국우주인은 달나라 여행에서 우주를 보며, 창조의 신을 느끼고, 그 신을 찬양하였는가 하면, 옛 소련의 한 우주인은 우주에 갔더니 신은 보이지 않더라 라고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재미있지 않는가? 결국 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이 어떠냐에 따라, 보이고 느끼는 모든 것이 달리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Toynbee)는 그의 대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는 단순한 경제적 영향력이 아닌 어떤 강력한 정신적 영향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역사가 붙들려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에 역사속에 신의 섭리를 부인하는 사람은 단연코 역사는 인간 행위의 결과이고 연속된 시간이 낳는 우연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역사속에는 어떤 섭리니 정신 따위는 없고 오로지 물질의 상호작용에 의한 현상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흔히 말하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그 것이다.

역사속에는 과연 정신은 없고 나타나는 현상만 있는 것인가?

역사속에 나타나는 도도한 방향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패망의 세력이 가지는 역사적 공통점, 흥하는 세력이 지니는 공통점, 세계사를 향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기독교적인 예언과 그것의 성취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스라엘을 보자.

그들의 오랜 역사속에 나타난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들은 하나같이 신의 섭리를 설명하면서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의 생애를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역사를 이야기하고, 그 역사와 함께한 신을 기억하고 순종할 것을 이야기하였다.

모세는 자신이 기록한 역사서 신명기 327절에서 옛 시대를 기억하라. 오래 전의 세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어보라. 네게 말해줄 것이고, 네 장로들에게 물어보라. 네게 설명해주리라( Remember the days of old; consider the generations long past. Ask your father and he will tell you, your elders, and they will explain to you.) 말한다.

이스라엘 역사는 곧 성경이고, 이 성경은 어떤 면에서는 역사에 대한 예언과 성취의 연속이자, 이러한 교훈을 주고자 한 신과 예언자들의 뜻을 적어 모은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후, 신약시대에도 이러한 역사를 통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이를 강조한 것은 계속된다. 바울(Paul)과 스데반(Stephen)과 그 외의 많은 큰 사도들도 그러한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고, 특히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Sanhedrin)에서 행한 민족역사에 관한 연설(사도행전 7:2-53)은 역사를 통한 신의 섭리를 역설한 대서사시적 연설로도 유명하지 않은가?

 

더욱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 성경에는 이 세상의  어느 책에서 발견할  수 없는 인류 최초의 탄생과 인류 최후의 역사 즉 처음과 마지막에 대한 역사도 분명히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그 내용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역사속에 나타나는 정신 즉 보이지 않는 힘을 인정하느냐 않느냐는 것이고, 이 것은 마치 신을 믿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같은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모두가 일어날 수 없는 장래의 일을 미리 이야기하고, 또 그 말대로 정확히 이루어진 많은 분들의 역사에 대한 주장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역사속에 나타나서 실존했던 인물들이 그렇다.

예수님이 그렇고,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과 수많은 사도가 그렇다. 그들은 역사속에 나타난 신의 섭리를 분명히 보고 예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의 예언은 이루어져 왔고, 또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는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역사를 보는 사람이 어떤 가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역사를 주관하는 힘을 발견하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한다.

 

앞에서 말한 어느 역사학도의 주장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다만 역사속에 나타난 보이지 않는 섭리를 보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보고 신은 없다고 진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

그 사악한 일성이 북한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어느 탈북자의 이야기대로 꼬리없는 짐승 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망가뜨려놓고서도 수십 년간을 절대권력과 영화를 다 누리고 갔으니, 신이 어디 살아있다면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하는 식의 의문이 그것이고,

한 편으로는 착하디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 온갖 질병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모습이 도저히 선하신 신이 살아 있다면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 또한, 그러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사람이 보기에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신의 섭리를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 기준 안에 들어오지 않으니 이건 신이 없다는 증거다 라고 생각해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인간의 기준이라면 신을 믿고 찬양하는 신앙인들을 사자의 밥이 되게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요, 그를 핍박한 정치세력은 당장에 천벌을 받아야 할 것인데 보란 듯이 잘 살고 번성해가고 있으니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언제 신이 우리 인간들의 도덕 선생이나 된다는 말인가? 라고 말이다.

신은 결코 인간 양심이니 도덕이니 하는 등의 인간적 기준으로 판단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신은 이미 신으로서의 의미가 없고 인간적 교훈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을 창조한 존재가 신이라면, 신이 인간이 세워놓은 기준안에 다 들어올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다만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정말 미미한 한 부분만을 느끼며, 살아 갈뿐인 것이다.

그러니 뉴턴(Newton)이 자신의 과학적 업적을 평가하면서, 창조주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과학적 업적이라고는 바닷가의 모래알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신을 알고,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간 위대한 과학자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볼 때, 악의 세력이 악의 세력을 벌주고, 악한 세력에 대한 보응이 쉽게 그리고 빨리 나타나지 않기도 하며, 악의 세력이 사람들에게 가하는 극심한 고통 등도 사실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이유와 행위에 대한 정당한 응보일 수가 있음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악하다고 평가한 그 대상조차도,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들의 생각과는 달리, 신은 할 수만 있으면 그러한 사람들 조차도 오래 참음으로 용납하려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Peter)는 자신의 편지글에서 신은 어떤 사람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를 기다린다.(베드로후서 3:9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고 하는 신의 섭리를 역사속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불과 몇 천 년의 인간역사로 영원의 시간을 예단하려는 당신은 누구인가?

베드로는 계속해서, 신의 입장에서 볼 때 시간은 인간의 관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신에게서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으므로, 우리가 보응이 빠르다 또는 늦다라고 하는 생각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다.(베드로후서 3:8 With the Lord a day is like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are like a day.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역사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고, 느끼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였다고 해서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당신은 독선의 도가니에 빠진 사람은 아닌가?

때로는 사실을 그려놓은 역사마저도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승자가 왜곡시킨 조작된 역사로만 보려는 편향된 역사의식속에 갇혀 있지는 않는가?

 

역사속에 신의 섭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라기보다는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이거나, 또는 발견하였느냐, 못하였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마치 어떤 섬을 발견한 항해사가 그 섬을 이야기할 때, 섬을 보지 못한 항해사가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몰아 붙이면서, 섬은 절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언젠가는 멈춰 설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역사는 지금도 신의 섭리에 의해 의도된 최후의 한 시점을 향해 진행되고 있음을 보자.

신은 스스로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이야기하며,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 반드시 나타날 존재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 1:8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